"지시한 적 없다"더니…검찰수사로 들통난 추미애 대국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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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명달빛 작성일20-09-29 19:24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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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보좌관에게 지원장교 연락처 발송
아들 및 부대에 전화지시 및 사후보고 받아
국회에서는 "지시한 적 없다"며 역성 내기도
대국민 거짓말에 따른 책임론 거세질 듯서울동부지검이 추미애 법무부장관 아들 특혜휴가 관련 모든 의혹을 무혐의 처리했지만, 추 장관이 국회에서 거짓말을 한 사실이 새롭게 확인되면서 정치적 파문이 커질 전망이다.(자료사진)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검찰 수사결과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국회 대정부질의 등에서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추 장관은 보좌관과 군부대 관계자 사이 전화통화에 대해 "지시한 적 없다"거나 "모른다"고 답했지만, 보좌관에게 사실상 전화를 지시하고 또 보고를 받는 등 일련의 과정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28일 서울동부지검이 발표한 수사결과에 따르면, 2017년 6월 14일 추 장관과 당시 보좌관은 아들의 휴가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보좌관은 14일 오후 4시 20분 경 "서씨 건은 처리했다"고 카카오톡 메신저를 통해 보냈으며, 같은 날 6시 20분 경 "소견서는 확보 되는대로 추후 제출토록 조치했다"고 보고했다. 14일은 아들 서씨의 1차 병가가 끝나가는 시점으로, 연장을 위한 조치를 보좌관에게 지시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주일 뒤인 6월 21일 추 장관과 보좌관의 메시지 내용에서는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추 장관은 오후 4시경 서씨 부대 지원장교 연락처를 보좌관에게 보냈으며, 30분 뒤에는 "아들과 연락을 취해달라"고 지시한다. 보좌관은 "바로 통화를 했다. 지원장교에게 예후를 더 봐야해서 한 번 더 연장해달라고 요청해놓은 상황"이라며 "예외적 상황이라 내부검토 후 연락을 주기로 했다"고 보고한다.
이는 추 장관이 국회 대정부질문이나 법사위에서 한 발언과 전혀 다른 것이어서 파문이 예상된다. 추 장관은 '보좌관이 부대에 전화한 사실을 아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가 이후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로 말을 바꿨다. "사적인 지시를 보좌관이 왜 하느냐"고 되려 역성을 내기도 했었다. 전국민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거짓말을 한 셈이다.
법적 책임을 떠나 거짓말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검찰발표에서 새로운 사실, 보좌관에게 사적인 지시 한적 없다는 추 장관의 발언은 거짓이었음이 확인됐다”며 “범죄혐의는 뭉갤 수 있지만 추 장관의 거짓말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자진사퇴를 촉구했다.
데일리안 정계성 기자 ([email protected])
ⓒ (주)데일리안 - 무단전재, 변형, 무단배포 금지
추미애, 보좌관에게 지원장교 연락처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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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는 "지시한 적 없다"며 역성 내기도
대국민 거짓말에 따른 책임론 거세질 듯서울동부지검이 추미애 법무부장관 아들 특혜휴가 관련 모든 의혹을 무혐의 처리했지만, 추 장관이 국회에서 거짓말을 한 사실이 새롭게 확인되면서 정치적 파문이 커질 전망이다.(자료사진)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검찰 수사결과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국회 대정부질의 등에서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추 장관은 보좌관과 군부대 관계자 사이 전화통화에 대해 "지시한 적 없다"거나 "모른다"고 답했지만, 보좌관에게 사실상 전화를 지시하고 또 보고를 받는 등 일련의 과정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28일 서울동부지검이 발표한 수사결과에 따르면, 2017년 6월 14일 추 장관과 당시 보좌관은 아들의 휴가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보좌관은 14일 오후 4시 20분 경 "서씨 건은 처리했다"고 카카오톡 메신저를 통해 보냈으며, 같은 날 6시 20분 경 "소견서는 확보 되는대로 추후 제출토록 조치했다"고 보고했다. 14일은 아들 서씨의 1차 병가가 끝나가는 시점으로, 연장을 위한 조치를 보좌관에게 지시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주일 뒤인 6월 21일 추 장관과 보좌관의 메시지 내용에서는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추 장관은 오후 4시경 서씨 부대 지원장교 연락처를 보좌관에게 보냈으며, 30분 뒤에는 "아들과 연락을 취해달라"고 지시한다. 보좌관은 "바로 통화를 했다. 지원장교에게 예후를 더 봐야해서 한 번 더 연장해달라고 요청해놓은 상황"이라며 "예외적 상황이라 내부검토 후 연락을 주기로 했다"고 보고한다.
이는 추 장관이 국회 대정부질문이나 법사위에서 한 발언과 전혀 다른 것이어서 파문이 예상된다. 추 장관은 '보좌관이 부대에 전화한 사실을 아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가 이후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로 말을 바꿨다. "사적인 지시를 보좌관이 왜 하느냐"고 되려 역성을 내기도 했었다. 전국민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거짓말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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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정계성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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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이란 세상 헤쳐나갈 수 있는 영성… 당당하고 여유 있는 태도로 낙담치 않고 목표 향해 달려가야정성진 목사가 2018년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열린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회개 및 3·1운동 100주년을 위한 한국교회 일천만 기도대성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젊은이들이여 야성(野性)을 가져라.”
목회를 하면서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에게서 희망도 봤고 때 이른 좌절도 엿봤다. 힘이 빠진 이들에게 늘 야성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야성은 힘든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영성을 의미한다. 가진 게 없어도 부자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 형편이 보잘것 없더라도 왕처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야성이다.
금수저와 흙수저란 비교는 결국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흙수저라고 해도 다른 제3세계에서는 금수저가 될 수 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마음의 문제다. 인간은 만인만색이다. 대기업 임원이나 대형교회 목사만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일을 하든 모두 소중한 일이다. 자신이 원하는 길로 꿋꿋하게 걸어가면 된다. 그 여정의 끝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나도 흙수저였다.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야성을 가지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유다. 아버지는 굉장히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내가 자랄 때는 집안이 완전 망했다. 교회 관리집사였던 어머니와 청소를 하며 교회에서 자랐다. 학창 시절에는 학업보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긴 세월 무술에 심취했었다. 취업을 위해 공업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정작 취업을 제때 하지 못했다. 무려 여덟 차례나 고배를 마신 뒤 환경관리기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에야 겨우 동아제약에 입사했었다. 뒤늦게 진학했던 방송통신대는 무려 11년 만에 졸업했다. 신학대에 입학해서도 난관이 많았다. 민중신학에 심취했던 나는 각종 시위를 주도했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서울장신대를 졸업한 뒤에는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던 광산촌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다. 이론으로 배웠던 민중신학을 목회 현장에서 적용해 보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장신대 신학대학원 학우회장을 할 때는 학내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대학 재단사무국장이었던 장로와 갈등을 빚었던 일이 있다. 이 장로가 시무하던 서울의 한 교회를 찾아가 장로를 만나는 과정에서 드잡이까지 했는데 훗날 이 교회에서 목사 안수식이 열렸다. 그때 일을 기억하던 장로들이 내가 안수 받는 걸 반대하고 나서면서 큰 위기에 봉착했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됐다. 돌아보면 추억이지만 매 순간 험난한 삶이었다.
내 삶은 빛나던 순간보다 그렇지 못했던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한순간도 낙담하지 않았다. 이런 용기가 나를 키웠다. 내세울 이력이 많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를 거룩한빛광성교회에서 멋지게 사용하지 않으셨던가.
낙담하면 안 된다. 젊은이답게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우리에게 주신 삶의 의미이다. 희망을 품고 미래를 개척하는 야성을 키워야 한다.
정리=장창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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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하면서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에게서 희망도 봤고 때 이른 좌절도 엿봤다. 힘이 빠진 이들에게 늘 야성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야성은 힘든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영성을 의미한다. 가진 게 없어도 부자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 형편이 보잘것 없더라도 왕처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야성이다.
금수저와 흙수저란 비교는 결국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흙수저라고 해도 다른 제3세계에서는 금수저가 될 수 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결국 마음의 문제다. 인간은 만인만색이다. 대기업 임원이나 대형교회 목사만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일을 하든 모두 소중한 일이다. 자신이 원하는 길로 꿋꿋하게 걸어가면 된다. 그 여정의 끝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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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대 신학대학원 학우회장을 할 때는 학내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대학 재단사무국장이었던 장로와 갈등을 빚었던 일이 있다. 이 장로가 시무하던 서울의 한 교회를 찾아가 장로를 만나는 과정에서 드잡이까지 했는데 훗날 이 교회에서 목사 안수식이 열렸다. 그때 일을 기억하던 장로들이 내가 안수 받는 걸 반대하고 나서면서 큰 위기에 봉착했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됐다. 돌아보면 추억이지만 매 순간 험난한 삶이었다.
내 삶은 빛나던 순간보다 그렇지 못했던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한순간도 낙담하지 않았다. 이런 용기가 나를 키웠다. 내세울 이력이 많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를 거룩한빛광성교회에서 멋지게 사용하지 않으셨던가.
낙담하면 안 된다. 젊은이답게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우리에게 주신 삶의 의미이다. 희망을 품고 미래를 개척하는 야성을 키워야 한다.
정리=장창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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